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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역사_설명 |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차하여 《흥왕조승(興王肇乘)》 4편(編)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 성수(星宿)를 보면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의 분야에 해당하였는데, 옛적에 단군께서 나라를 일으키신 때는 도당씨(陶唐氏) 7282) 때와 일치하고 기자께서 봉해지신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체로 그 풍토가 중국과 서로 비슷한 데다 중국의 교화를 점차로 입게 된 결과 의관(衣冠)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고 문자도 오랑캐의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다만 왕씨(王氏) 7283) 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예교(禮敎)가 일으켜지지 않고 윤기(倫紀)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치고 찌르는 것을 능사로 삼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단군과 기자께서 남겨주신 풍도를 까마득히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58장 A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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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제주(濟州) 대정현(大靜縣)의 당포(唐浦)에 어느 나라 것인지 분변 못하는 큰 선박이 지나가다가 다섯 사람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곧 선박을 내치어 갔는데, 내려놓은 다섯 사람의 의제(衣制)와 상모(狀貌)가 대단히 괴이하여 입은 것이 좁아서 몸을 묶은 것 같았으며, 발에는 버선을 신지 않았고 머리에는 등립(?笠)을 썼는데, 얼굴과 몸이 모두 검어서 형상이 팔 긴 원숭이 같았으며, 왜가리가 시끄럽게 지절거리는 것 같아서 인하여 정상(情狀)을 물을 수 없어 글씨를 쓰게 한즉 오른손에 붓을 잡고 왼쪽에서부터 횡서(橫書)로 쓴 것이 전자[篆]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어서 난잡하기가 엉클어진 실 모양과 같았다고 도신(道臣)이 이로써 계문(啓聞)하자, 육로로 해서 북경(北京)에 들여보내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50장 A면
이때 제주(濟州) 대정현(大靜縣)의 당포(唐浦)에 어느 나라 것인지 분변 못하는 큰 선박이 지나가다가 다섯 사람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곧 선박을 내치어 갔는데, 내려놓은 다섯 사람의 의제(衣制)와 상모(狀貌)가 대단히 괴이하여 입은 것이 좁아서 몸을 묶은 것 같았으며, 발에는 버선을 신지 않았고 머리에는 등립(?笠)을 썼는데, 얼굴과 몸이 모두 검어서 형상이 팔 긴 원숭이 같았으며, 왜가리가 시끄럽게 지절거리는 것 같아서 인하여 정상(情狀)을 물을 수 없어 글씨를 쓰게 한즉 오른손에 붓을 잡고 왼쪽에서부터 횡서(橫書)로 쓴 것이 전자[篆]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어서 난잡하기가 엉클어진 실 모양과 같았다고 도신(道臣)이 이로써 계문(啓聞)하자, 육로로 해서 북경(北京)에 들여보내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50장 A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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